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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간직하고 있던 사소한 일상들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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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간직하고 있던 사소한 일상들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베르양 2023. 10. 7. 21:22

어디선가 많이 본 것만 같은 익숙한 느낌의 작품. 아마 여러 글로벌 브랜드와 콜라보한 작품들을 알게 모르게 봐와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그냥 글로벌 브랜드도 아니고 뉴욕 타임스, 구글, 페이스북, 구찌, LG 등과 같이 엄청난 대기업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알듯말듯한 작품의 주인공을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 전시였다.

 

ⓒ Ilya Milstein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호주 멜버른에서 자랐으며 미국 뉴욕에서 활동 중인 일리야 밀스타인은 놀라운 디테일과 맥시멀리즘 화풍으로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 경이로운 디테일에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묘한 울림을 주는 요소가 있는데, 이는 그가 뉴욕을 넘어 세계적으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이번 기억의 캐비닛 전시는 미술관 측에서 기획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섹션을 직접 기획해 공개했다고 한다. 작가 일리야 밀스타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점 타인과 우리가 사는 세계로 다다르는 여정을 네 개의 섹션을 각각의 '캐비닛'으로 은유하여 보여준다고 한다. 확실히 사전 정보를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고 관람을 했을 때는 그저 작품을 열거한 것 같았지만, 기획 의도를 다시 보고 작품을 돌이켜보니 정말로 혼자 - 내면에서 나아가 여러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행복한 이야기만을 그려내지는 않았다. 사람의 감정이 여러갈래로 다양하듯이 그가 그린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채로운 표정과 행동을 짓고 있다. 행복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표정들을 말이다.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을 찬찬히 보다보면 그림이 정말 섬세하고 꼼꼼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소소하소 사소한 것들의 디테일을 모두 잡아내고 살려내 압도적인 느낌이 들게끔 표현해냈다. 일본의 만화 <신부 이야기> 작가가 말하기를, 본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작품 내 패턴(벽지나 러그 등에 있는)을 모조리 손으로 한땀한땀 그린다고 했다. 아마 비슷한 류의 사람이 아니었을까.

 

ⓒ Ilya Milstein

 

마지막 세션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들이 있었다. 사람이 쓰던 물품들은 그대로 있었으니 처음부터 사람이란 존재가 아예 없었던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분명 작품의 배경은 인류가 사라진 디스토피아적인데, 오히려 동식물들의 표정에는 웃음이 보인다. 아니, 사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이 더 이상 웃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작가는 이전부터 다양한 예술 작품에 감명과 영감을 받아 그만의 다채롭고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가 한국의 문화에서도 무언가 채용할 것을 찾아내 그의 화풍에 녹아든 것을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 Ilya Milstein

 

일상이 사소하고 지루하다고만 생각이 든다면 일리야 밀스타인의 전시를 한 번 보도록 하자. 어쩌면 다시금 되돌아보았을 때 생각보다 그 사소했던 부분에서 뭔가 특별한 기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